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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 원인 - 시작부터 현재까지

정보킹왕 2023. 10. 16.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 특히 가자지구의 전쟁은 강대국과 UN에서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분쟁은 왜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지 분쟁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소개합니다.

 

팔레스타인_이스라엘_분쟁의_원인_섬네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소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이 지속되는 이유를 알기 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기본적인 지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중동국가라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위치는 아래 지도를 참고하면 되는데,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국가입니다. 해당 지역은 아주 과거부터 보자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영의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 지중해, 홍해, 수에즈 운하 어디에서도 올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보통 민족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지역명입니다. UN에서 팔레스타인을 옵저버 국가로 인정하면서 사실상 국가로 인정이 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미국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옆의 서안 지구를 합쳐서 말하는데, 분쟁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지역은 바로 가자 지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예루살렘인데,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거대한 유일신 3대 종교의 성지입니다. 유대교의 경우 3천년전 솔로몬 유대교 성전이 예루살렘이고, 아브라함이 신에게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도 예루살렘이죠. 이슬람의 경우 예언자 모함바드가 승천한 곳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가 십자가에 목 박힌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이 있기 전 중세시대부터도 십자가 전쟁 등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_가자지구_구글지도

 

반유대주의,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

유대인, 아랍인의 역사를 조금 설명을 하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4천년점쯤 아브라함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나안,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성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고, 이후에 다시 본처라고 할 수 있는 사라와의 사이에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 이스마엘에서부터 파생된 민족이 아랍인이라고, 이삭으로부터 파생된 민족을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강대한 국가를 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집트로 이동하는데, 이집트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아는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모세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돌아온 팔레스타인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건설된 왕국이 이스라엘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왕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리되고,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일부 남은 유대인들은 로마시대에 와서 마사다 요새에서 최종적으로 로마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사다의 비극입니다. 이후 로마는 유대민족 자체를 예루살렘에서 쫓아내는데 이때부터 유대민족들은 약 2천 년 동안 전 세계로 유랑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주로 동유럽, 유럽이 해당되며 이를 디아스포라 합니다.

 

  • 4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브라함이 오게 됨
  • 배다른 형제인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 이스말에로부터 아랍인이 파생, 이삭으로부터 유대인 파생
  • 이스라엘 왕국 건설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리되지만 각각 아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멸망
  • 로마시대에 와서 예루살렘에서 추방, 전 세계 유랑생활이 시작됨

 

반유대주의

위에서 설명한 내용이 대략 4천 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럽의 국가들 입장에서는 로마시대에 이를 때까지 매우 긴 시간을 유대인과 분쟁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 내에는 반유대주의가 꾸준히 확산되어 왔고, 19세기 후반쯤에는 훨씬 더 격렬해지고 고착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데, 알렉산더 2세 암살과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알렉산더 2세는 지금으로 치면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는데 암살당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유대인이 암살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반유대주의는 더욱 커지고, 유럽 국가들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포병장교 대위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장교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팔아넘기는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드레퓌스가 지목받게 됩니다. 해당 사건은 시간이 지나서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반유대주의는 매우 커져버린 상황이었습니다.

 

  • 유럽 전역에 반유대주의가 확산됨
  • 알렉산더 2세 암살, 드레퓌스 사건으로 반유대주의는 더욱 격렬해지고, 탄압이 시작됨

 

시오니즘

유럽사람들이 반유대주의로 가득 차 있었고, 반유대주의가 커질수록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은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언덕을 지칭하는 말인데,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생각하는 유대민족에게 팔레스타인은 하나님이 유대민족을 위해 예비하신 땅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시오니즘입니다.

 

문제는 돌아가서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이 있다면, 이미 그 땅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기본적은 분쟁 구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즉, 돌아오려는 시오니즘과 정착해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대립입니다.

 

시오니즘도 초기에는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사람들과 중립적인 사람들, 오히려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테오도어 헤르츨도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커지고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는 언론인이었던 헤르츨은 반유대주의를 보면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시오니즘의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반유대주의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오니즘은 더 커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대국가를 구성해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생김
  • 반유대주의가 커질수록 시오니즘이 더 커지게 됨
  • 시오니즘을 비판하던 헤르츨을 중심으로 시오니즘 운동이 더욱 확산됨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은 추방을 당했지만, 당연히 팔레스타인에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고통받으면서 살았는데, 로마에 속해 살다가, 7세기에는 이슬람 제국에 또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국가를 구성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독립국가에 대한 갈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지속적인 전쟁으로 약해지는데, 오스만,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연합군과 러시아의 크림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승리를 한 것이지 자력으로 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기 때문에,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 유업인을 이주시키고, 투자도 하며, 선교활동도 하게 됩니다. 즉, 기존 팔레스타인 주민, 이주 주민, 시오니즘 이주민 간의 분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팔레스타인은 로마,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지속적인 지배를 당함
  • 독립국가에 대한 갈망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됨
  • 크림전쟁 이후 영국, 프랑스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 투자, 선교 등이 시작됨
  • 탈레스타인 기존 주민, 이주 주민, 시오니즘 이주민 간의 분쟁이 이미 시작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의 도화선, 영국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 전쟁 초기 소련이나 미국, 중국 같은 강대국들의 행동이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는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게는 영국이 그런 존재입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나 침략을 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잘못된 선택을 많이 하는데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에서도 잘못된 두 개의 협정과 선언으로 도화선의 역할을 합니다.

 

후세인-맥마흔 협정

초기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독일 연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국의 전쟁이었습니다. 이후에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독일 연맹의 편에 서게 됩니다. 전선이 점점 확대가 되고 길어지는 과정에서 영국은 부담을 느끼게 되는데.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아랍민족을 이용하게 됩니다. 바로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이용해 아랍의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죠.

 

당시에 아랍 국가는 없었고,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지배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문집안들은 여전히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명문가라고 불리던 집안이 하심가였고, 이 하심가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후세인이었습니다. 이 후세인과 이집트에 있던 영국 외교관이 전쟁 초기에 맺은 협정이 후세인-맥마흔 협정입니다. 협정의 내용은 오스만 내부에서 아랍인들이 오스만에 항거를 해주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아랍국가 건설을 영국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오스만 제국에 항거를 한 것이죠. 결론적으로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있는 국민이 아니라 아랍국가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는 듯한 상황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 영국의 아랍 민족주의를 이용한 아랍 명문가 후세인과 영국 외교관 맥마흔의 협정
  • 오스만 내부에서 아랍인들이 항거를 해주면, 전쟁 후 아랍국가 건설을 영국이 지원하겠다는 것

 

사이크스-피코 협정

영국과 협정을 통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랍인들은 넓은 오스만 제국에 자신들의 아랍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쟁은 영국만 한 것이 아니었죠. 러시아를 제외하더라도 당장 프랑스라는 당시 강대국이 함께 전쟁을 했기 때문에 영국의 협정만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나눠가질지에 대한 협정을 맺는데, 이 협정이 바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입니다. 영국입장에서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이미 맺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는 협정을 프랑스와 가져야 하는데, 실제로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두고 그냥 자를 데고 사선으로 줄을 그거 버린 겁니다. 북서쪽은 프랑스가 가지고, 남동쪽은 영국이 가지기로 했는데 북서쪽은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지역, 남동쪽은 이라크, 요르단 지역입니다.

 

아랍인들은 국가가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는 영국이 가지게 된 지역에 국가를 건설하면 된다고 했고, 또 누구는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가 가지고 간 북서쪽이 고향이다. 등 중동의 분쟁의 도화선이 되어버린 거죠. 쉽게 생각하면 내 땅에서 나가라! 거기가 내 땅이니깐 네가 나가라! 이런 상황이 이어지는 거죠.

 

  • 전쟁 후 오스만 제국을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나눠가질지에 대한 협정
  • 지도에 사선을 그어, 북서쪽은 프랑스, 남동쪽은 영국이 가지기로 함
  • 중동의 분쟁의 도화선이 됨

 

밸푸어 선언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동안 지속되었고, 영국은 빨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미국이 참전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초기부터 미국의 참전을 원했죠. 하지만 미국이 참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이번에 유대인들을 이용합니다. 미국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 및 유대인 단체, 거대 금융을 이루어낸 유대인 자본가들을 이용하는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가였으며,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밸푸어 선언을 합니다.

 

밸푸어 선언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영국을 도와주면, 시오니즘에서 말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당장 몇 년 전에 영국이 아랍인들과 맺었던 후세인-맥마흔 협정과 공존할 수도 없기 때문에 전쟁 이후 아랍인과 유대인들의 분쟁을 초래하게 됩니다.

 

  • 영국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원해 미국 내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을 포섭하려는 선언
  • 미국에 있는 유대인이 영국을 도와주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도록 돕겠다는 선언
  • 기존 후세인-맥마흔 협정과 공존할 수 없는 선언

 

이스라엘 독립선언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비율 증가

여러 가지 협정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팔레스타인 총인구의 10% 정도가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유대인 인구는 증가하게 되는데, 밸푸어 선언 때문이었죠.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만들어주겠다고 영국이 선언을 했기 때문에, 기대와 민족적 신념을 가지고 이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반유대주의가 커지면서 시오니즘이 증가하면서, 유대인의 유입은 점점 더 늘어나게 됩니다.

 

영국에서도 시오니즘을 완하시기키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하는데, 우간다, 아르헨티나에 땅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오니즘의 기본이 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고, 연고도 없는 지역에 가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시오니즘은 더 강화되고 더 많은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30% 정도까지 비율이 증가하게 됩니다.

 

  •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됨
  • 밸푸어 선언과 유럽 내 반유대주의, 시오니즘 확대로 유대인 유입이 늘어남
  •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유대빈 비율이 30%로 증가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유대인의 충돌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비율이 10% 일 때와 30%일 때는 충돌의 정도가 매우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밸푸어 선언도 있고,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 원주민들보다 미국 등 해외에서 상당한 자본과 영향력을 갖춘 유대인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계 기업의 제품을 정부차원에서 구매를 해주기도 하고, 팔레스타인 자치령 내 공무원, 경찰을 유대인을 더 많이 채용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영국 통치령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가나라는 위병대를 만듭니다. 처음은 자체적인 민병대의 규모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조직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하나가 출신은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메나헴 베긴을 들 수 있습니다. 반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군사조직이 전혀 없었고, 경찰마저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가는 팔레스타인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고 심한 경우 학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통치국인 영국에 대항하여서 함께 파업을 하기도 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가지는 시기도 있습니다. 다만 유대인의 세력은 점차 늘어나고, 팔레스타인 세력은 점차 위축되고, 줄어들게 됩니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강대국이 아닌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 약탈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 영국의 친유대인 정책
  • 유대인 위병대 하나가 창설
  • 하나가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약탈과 학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 영국입장에서는 중동에 있는 석유가 필요하고, 세계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아랍국가로부터의 신임도 필요한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심의 정책을 팔레스타인을 배려하는 형식으로 바꿔나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과 영국의 관계가 조금 틀어지게 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도층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독일의 편을 들어버리는 겁니다.

 

팔레스타인이 독일의 편을 들었는데, 독일은 패전국이고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너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 대학살을 한 홀로코스트로인해서 유럽사람들은 반유대주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유럽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머물 수 있는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 속에서 유대인 난민들이 대거 생기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럽국가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아로는 갈 수 없고, 미국은 선별해서 유대인을 받아주었기 때문이죠. 반유대주의가 있는 유럽에서는 내 땅에 오는 것이 싫은데,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가 생기면 난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이스라엘_독립선언
이스라엘 독립선언 - 가운데 사진이 위에서 설명한 헤르츨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독일 지지,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 유대인 난민 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가 건설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미 영국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은 투자를 해둔 상태라는 국가적 상황, 자신들의 지지아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가 건설되었을 때 중동지역에 지속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라는 정치적 상황, 시오니스트들의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움직임 등이 모두 작용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합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독일 지지
  •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과 반유대주의
  • 유대인 난민 문제
  • 중동지역에 지속적인 영향력 행사
  • 여러 상황을 이용한 시오니스트들의 활약
  • 위의 이해관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중동전쟁과 버림받은 팔레스타인

제1차 중동전쟁

영국 자치령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충돌은 해결해야 되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는데,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고, 이스라엘이 독립 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선언과 별개로 영국은 떠나면서 UN에 나머지일을 일임해 버리는데, UN 입장에서도 원주민들을 쫓아낼 수도 없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결국 분할 결정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을 6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3 지역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게 주었는데, 면적으로 치면 팔레스타인이 44%, 이스라엘이 56%에 해당이 됩니다. 유대인의 비중은 30%인데 이스라엘에게 더 넓은 면적을 주니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1948년에 영국이 완전히 떠나게 되면서 아랍국가들이 같은 이슬람 형제인 팔레스타인을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됩니다. 이게 제1차 중동전쟁입니다.

 

  • 영국 자치가 종료되고, UN에 일임하게 됨
  • UN은 이스라엘에 56%, 팔레스타인에 44%의 땅을 분할해 주는 결정을 함
  • 팔레스타인은 수용하지 못했고, 영국이 떠난 이후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함

 

아랍국가의 진짜 속내

아랍국가의 일반 국민들의 생각은 팔레스타인을 돕는 것이 종교적, 민족적으로 이슬람 형제인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유대교도들이 쫓아내고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는 것이죠.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이 제1차 중동전쟁을 하게 된 이유는 UN에서 인정한 44%의 땅을 노린 것입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는데,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면적은 78%로 늘어나고, 22%만이 팔레스타인의 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22% 땅마저도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아니라 일부는 요르단이, 일부는 이집트가 차지하게 됩니다. 즉 팔레스타인에 원래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살고는 있지만 요르단, 이집트의 땅이 되어버린 겁니다. 전쟁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학살, 토지몰수 등의 방법으로 몰아내기 시작하는데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전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70%가 난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아랍국가 일반 국민들의 생각 : 이슬람 형제인 팔레스타인을 도와주자!
  • 아랍국가 지도층의 생각 : 44%의 땅을 차지하자!
  •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78%의 땅을 차지하게 됨
  • 나머지 22%의 땅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아니라 요르단, 이집트의 차이가 됨
  • 팔레스타인 원주민 70%가 난민으로 전락함

 

제2, 3차 중동전쟁

중동 전쟁은 30년 동안 총 4차례 일어나는데 제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집트에 있는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집트 대통령인 나세르가 국유화를 선언해 버립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을 하였고, 이스라엘이 여기에 동조를 하면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전쟁입니다.

 

제3차 중동전쟁은 앞의 두 전쟁과 달리 이스라엘에서 먼저 시작한 전쟁이고, 지금 현재 상황으로 고착된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제3차 중동전쟁을 6일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6일 만에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랍 국가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강해져 있었고, 미국의 지원이 충분했으며, 아랍 국가는 국가로써 군사, 경제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가자지구에 있던 이집트를 몰아내고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지역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가 점령하고 있었던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이전에는 그래도 동일한 종교의 아랍민족 국가에게 지배를 받다가 유대인의 지배로 바뀌게 되면서 더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이스라엘 공격 : 제2차 중동전쟁
  • 제3차 중동전쟁 : 인접한 아랍국가에 비해 월등히 강한 군사력을 이스라엘이 증명하듯 6일 만에 종료
  •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서안, 가자지구,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가지게 됨
  •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더 나빠진 상황이 되었고, 현재까지 고착되어 있음

 

제4차 중동전쟁과 버림받은 팔레스타인

3차까지 중동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는데, 제4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빠지게 됩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면서 끝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인정해 버리게 됩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과 국교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이지만,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믿었던 인접국가인 이집트에게 배신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다른 아랍국가들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을 배신(?)하게 되는데, 인접 아랍국가들 입자에서는 30년 동안 해결도 되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지겹고, 귀찮고,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지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이집트에 이어 마지막으로 의지할 종교적, 민족적 친분이 있는 아랍국가들 마저 떠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이 테러, 무장투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인정
  • 주변 아랍국가들도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외면
  •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자지막 지지 아랍국가들마저 배신한 상황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다(Intifada)

제1차 안티파다 이전 상황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는 약 1,1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이중에 60%가 난민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 여러 국가로 이주하여 해외 난민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기본적으로 탈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도록 되어 있는 곳인데, 이스라엘에서 이주정책을 별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지구에 집과 돈을 받고 이주하는 정착촌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이 정착촌은 매우 부유한 편에 속합니다. 반대로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들은 대부분 난민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탈레스타인 난민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PLO라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만들게 됩니다. 이 PLO가 지금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을 이끄는 핵심 조직이 됩니다. PLO 안에서도 여러 분파가 존재하는데 쉽게 여러 정당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중에는 강경파도 있고, 게릴라 활동을 하는 분파도 있습니다. 

 

PLO 중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는 검은 9월단이라는 분파가,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여한 이스라엘 선수단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는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인질들이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PLO의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는 나빠지고, 요르단 같은 아랍국가에서 추방도 당하게 됩니다. 미국으로부터 테러단체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뮌헨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인식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탱크를 싣고 가는 트럭이 팔레스타인 민간 차량과 사고가 나는데, 이사고로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1987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는 반이스라엘 운동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제1차 안티파다입니다.

 

  • 팔레스타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생활하게 됨
  •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생기게 됨
  • 같은 지역에 부촌인 이스라엘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함께 있어 박탈감이 더 심각해짐
  •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인 PLO가 만들어짐
  • PLO 분파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납치, 인질극을 벌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
  • PLO,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이미지, 상황은 매우 나빠지고, 테러단체로 지목됨
  • 지속적으로 상황 나빠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 사망 사고 발생을 계기로 반이스라엘 운동인 제1차 안티파다가 시작됨

 

제1차 안티파다와 결과

안티파다는 봉기, 발란을 뜻하는 아랍어로 반이스라엘 독립투쟁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매우 공격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제1차 안티파다의 경우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납세를 거부하거나, 노동자 파업, 자급자족 체제를 만들어내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처럼 일부 독립군만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매우 체계적이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여론이 팔레스타인에 매우 우호적으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국제적 여론 때문에 강력하게 진압할 수는 없었고, PLO와 오슬로 협정을 맺게 됩니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차치를 처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자치정부가 생기고 의장, 대통령도 생기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1차 안티파다 결과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3 지구로 나누어서 각각 1 지구에서 행정력과 경찰력을 가지고, 나머지 한 지구에서는 팔레스타인이 행정력을, 이스라엘이 경찰력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매우 환호하고 기뻐하였습니다.

 

  • 제1차 안티파다는 비폭력적이고 체계적이었음
  • 납세거부, 노동자 파업, 자급자족 체제를 만드는 활동
  • 국제적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어, 이스라엘과 오슬로 협정을 맺음
  •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처음으로 인정해 주고 행정력, 경찰력을 부분적으로 인정함

 

이스라엘의 기만과 제2차 안티파다

오슬로 협정이 맺어지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자신들이 기만당한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 위에서 3개의 지구로 나누었다고 했는데, 쉽게 A, B, C 3 구역이 있다고 치면 C구역이 A, B를 합친 거보다 넓었습니다. 그 가장 넓은 C구역을 이스라엘이 다 차지한 것이고, 그나마 B 지역도 경찰력을 이스라엘에서 가지고 있으니 무력으로 팔레스타인을 눌러버린 것이죠.

 

예루살렘도 A, B, C로 지역을 나눈 것처럼 서쪽은 이스라엘, 동쪽은 팔레스타인 영역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성지라는 성격상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강경파로 분류되는 리쿠드당이 이스라엘에 집권하면서 당시 대통령인 아리엘 샤론이 동예루살렘도 이스라엘로 귀속이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게 됩니다.

 

이 발언을 기점으로 제2차 안티파다가 시작되는데, 이 시점에는 

팔레스타인 역시 자치 행정력과 경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안티파다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또 우리가 지금 뉴스에서 많이 보는 상대적으로 무장투쟁을 원하는 하마스라는 조직이 이미 있었던 상태라 전쟁과 테러의 형태를 뛰게 됩니다.

 

  • 오슬로 협정이 표면적으로 자치를 인정하는 기만이라는 것을 알게 됨
  • 강경파 리쿠드당 집권 이후 동예루살렘 이스라엘 귀속 발언으로 제2차 안티파다가 시작됨
  • 1차와 달리 2차는 자치, 경찰, 무장투쟁을 원하는 하마스 조직 때문에 전쟁과 테러의 형태가 됨

 

파타와 하마스

파타와 하마스의 차이

팔레스타인은 UN에서 옵저버 국가로 인정을 받았고, 가자와 서안지구같이 행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도 정당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파타와 하마스가 있는데,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정당이 아니라 무력단체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이 대표적인 두 정당인 파타와 하마스의 차이를 알아야 현재 가자지구 분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_하마스_파타_문장
하마스와 파타의 문장

 

파타와 하마스의 차이를 간단하게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표를 참고해서 마지막 글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파타 하마스
서안지구 가자지구
세속적 근본적
온건파 강경파
상대적으로 오슬로 협약을 따름 오슬로 협약 자체를 불인정
자치를 원함 하나의 이슬람 국가를 원함

 

하마스와 가자지구

팔레스테인 이스라엘 분쟁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글이 길어졌는데, 드디어 마지막 최종적인 설명입니다. PLO 창성 이후 약 20년 이후에 아메드 야신에 의해서 하마스가 창설되었습니다. 초기에 하마스는 이슬람 센터를 만들어서 민중 교화, 의료 서비스, 교리 정리 등과 같은 정책을 정립하면서 민중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PLO 소속의 단체로써 활동을 해왔습니다. 문제는 오슬로 협정 이후 PLO를 뛰쳐나오게 되는데, 이유는 위에서 쭉 설명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는 여러 단체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하마스는 매우 근본적이고 강경한 성향을 뛰고 있습니다. 하마스가 원하는 것은 자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나라 하나의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시오니즘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준비해 된 땅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치를 인정받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마스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오니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들의 민심과 여론을 얻게 되고, PLO 즉, 파타의 경우 여론이 나빠지게 됩니다. 2006년에는 하마스가 총선까지 참여하여 과반이상을 차지하면서 제1당이 됩니다. 하마스와 파타는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내전까지도 일어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파타는 서안지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원하고, 강경한 하마스가 차지하고 있는 가자지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립되는데, 아래 사진은 영화 월드워 Z에 나오는 장벽으로 팔레스타인의 실제 장벽입니다. 일반적인 철조망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장벽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가자지구의 한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한쪽은 이집트 국경과 붙어있는데, 이집트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4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나머지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_장벽_영화_월드워Z_명장면

 

현실적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자지구 하마스입장에서는 전쟁 말고는 사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시오니즘에 근거한 국가건설이라는 뜻을 접을 수도 없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집트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비밀 땅굴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하고, 그 땅굴을 통해서 이집트 쪽에서 물자를 구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과 유혈 쿠데타, 테러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정당 중 하나인 하마스에서 통치 중
  • 하마스는 근본적인 강경파,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시오니즘이 핵심
  • 가자지구는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는 상황
  • 이집트를 통한 땅굴이 유일한 통로
  •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지 이미 수년이 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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